패티 머레이(Petty Murray)

패트리샤 린 
" 패티 " 머레이(Patricia Lynn "Patty" Murray)는 1950년 10월 11일 일곱 자녀중 하나로 태어난 패티머레이는 워싱턴 주 상원의원(1989~1993)을 역임하고 현재 미국 상원의원(1993년~현재)과 민주당 상원 예산위원장을 역임중이다.

패티 머레이는 잘못된 정책때문에 피해를 받는 같은 환경에는 시민들과 소통과 공유를 통해 워싱턴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고, 국민과 소통을 통해 민주당 예산 위원장과 미국 상원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평범한 아줌마 패티

패티 머레이가 정치판에 뛰어든 것은 정치적 후광 또는 배경 덕택이 아닙니다. 그녀가 정치를 하게 된 것은 더 나은 엄마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가 사회문제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전국에 있는 가정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워싱턴 대학에서 레크리에이션과를 나온 패티는어린 두 자녀를 좀 더 잘 키우기 위하여 모교에서 주최하는 양육 관련강좌에 등록했습니다. “어느 날 수업을 들으러 갔다가 강사로부터 폐강되었다는 말을 듣게 되었지요. 지원금이 중단되었다고 하더군요.”

갑작스런 폐강에 놀란 페티는 이후 올림피아에 위치한 워싱턴 주 정부가 단행한 예산 삭감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곧장 두 아이를 차에 태우고, 무려 115Km나 떨어진 정부청사로 달려가 항의를 했습니다. 그런 결정이 일반 가정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지 로비스트, 행정 직원들을 붙잡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를 더욱 어리벙벙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주 입법부 의원 중 1명이 그녀에게 아무리 떠들어봤자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그저 애나 키우는 아줌마에 불과해요 .”그녀가 평생 잊지 못할 말을 듣고 만 것입니다.

정치에 뛰어들다

강좌 폐강 사건으로 패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전 무척 화가 난 상태로 집에 돌아왔어요. 제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그 사람들이 대체 누구냐고요? 누가 그들한테 의원 배지를 달게 해주었느냐 말이죠? 이리하여 그녀는 그들이 다시는 이런 식으로 국민을 홀대하지 못하게 만들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녀는 전국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는 모교 출신들인 교사와 학부모들에게 전화를 걸어 현 사태에 대해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를 기르는 부모라면 누구나 했을 그런 일을 제가 한 것뿐이에요. 여자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친구들에게 또 다른 친구들을 소개받는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결성할 수 있었답니다.”

패티는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오직 전화를 하고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만 전념했습니다. 그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었습니다.

3개월 만에 그녀는 1500명으로 결성된 학부모 모임을 만들어 국회로 갔습니다. 그들은 편지를 쓰고, 청원서를 작성하고, 시위행진을 하고, 급기야 폐강된 강좌를 부활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달콤한 승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패티는 ‘애나 키우는 아줌마들’도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셈입니다. “그때 그 말이 나한테 큰 가르침을 주었죠. 우리는 그 사람들이 무얼 하는지 불평만 하며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변화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도 있지요.” 당연히 그녀는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다른 목소리를 내다

강좌를 부활하고 삭감된 예산을 다시 따내는 것으로는 패티의 성에 차지는 않았습니다. 이 성공을 통해 패티는 의지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1980년대 초반이었고, 당시 그녀의 아들이 학교에 입학할 무렵이었습니다.

패티는 누가 아들이 다닐 학교를 선정하는지 알고 싶었고, 그래서 학교 이사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사회는 일선에서 물러나고 모두 장성한 자녀들만 두고 있는 5명의 노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 저들 중에서 누가 어린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 학교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과연 어느 누가 관심을 갖겠는가? 나는 생각했어요.”

그녀는 방 안을 둘러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나서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나설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학교 이사회에 출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녀는 300표 차이로 떨어졌지만 당선자가 3달 뒤에 죽는 바람에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7년 동안 이사직을 맡았고 끝내는 학교 이사회 의장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사직 덕분에 그녀는 워싱턴 주 의회를 맘껏 드나들 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학교 이사회를 대표해 교육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로비를 펼쳤습니다.

수시로 상원의원들과 국회의원들을 만나서 이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학교 이사회 회장이자 어머니였던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한 정책들은 의회 바닥에서조차 논의 되지 않고 있는 현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관람석에 앉아서 의회 바닥을 내려다보았지요. 거기에는 머리가 벗겨진 대머리의 사람들만이 가득 보이더군요. 그때 내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어린 자녀가 없는 저 사람들이 주요정책을 관장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내가 영향력을 갖고 나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는 내가 직접 저 의회에 출마하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소위 ‘정치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은 그런 패티를 말렸습니다. 당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돈도 정치적 배경도 없었어요. 하지만 저 같은 사람도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지요. 의회는 정치 엘리트만 있는 곳이 아니에요.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곳이어야 하지요. 우리는 각기 다른 목소리, 각기 다른 관점을 필요로 하지요.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런 목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권리는 없어요.”

그녀의 강한 결심은 그녀에게 반대주의자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심어주었고, 결국 유권자의 판단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유권자들은 그녀를 선택했습니다. 1988년, 그녀는 15년 동안 의원활동을 해오던 현직 의원을 물리치고 당당히 당선되었습니다.

선거운동 역시 예전과 똑 같은 방식으로 친구들에게서 도움을 얻었습니다.

“남편의 도움이 제일 컸어요. 아이들도 큰 힘이 되어주었죠. 내가 전화를 붙들고 있는 동안 남편과 아이들은 식탁 의자에 앉아 봉투에 우표를 붙이고 풀을 발랐답니다. 당시 내 아이들은 8살이어서 설거지 정도는 할 줄 알았죠.”

이리하여 국회의원이 된 패티는 의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부에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가족과 자녀들의 복지를 위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최대 현안 중 하나인 워싱턴의 가족휴직법(Family Leave Law)을 통과시키는 데 앞장섰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촉발시키는 사건이 의사당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녀는 클레어런스 토머스-애니타 힐(Clarence Thomas Anita Hill) 청문회를 지켜보게 되었고, 거기서 14명의 늙은 백인 남자들이 재판을 주재하는 광경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이 땅에서 법을 만드는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미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지 못하는 현실에 격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거의 충동적으로 그녀는 1992년 미국 상원의원에 출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상원의원으로 활동하다

그녀가 상원의원에 출마하겠다는 결심을 사람들에게 밝혔을 때 “나의 친구들은 ‘맙소사, 또 시작이야!’ 하는 반응을 보였고, 정치판 내부에서는 성공하지 못할 거라는 반응을 보였어요.” 그것은 그녀가 선택한 다른 전투와 마찬가지로 힘든 투쟁이었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혼자 힘으로 5년간의 의정 경험이 있는 한 하원의원과 맞서 싸워야만 했습니다. 그녀에게는 선거자금을 모으는 데 힘이 되어줄 든든한 정당도 없었고, 워싱턴 D.C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인사나 재력가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이길 승산이 전혀 없는 그저 평범한 시민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전문가들은 그녀가 주 의회에 출마할 때와 똑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일어나서 자신의 소신을 밝히고자 하는 불타는 각고 때문이었습니다. “내게 주어진 과제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는 별반 신경 쓰지 않았어요. 나는 오직 그 일의 결과와 중요성에만 집중했지요.”

이리하여 또다시 패티는 회의론자들의 예상을 뒤엎었습니다. 선거운동으로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지만, 유권자의 54%의 지지를 얻어 국회의사당에 입성하는 쾌거를 이루어냈습니다. 세상은 그녀의 승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로써 패티는 자신의 소신이 옳다는 것을 또다시 입증한 셈입니다. 여성 의원들이 여전히 국회에서 호기심의 대상으로 취급당하던 그 시절에 패티는 테일 후크 성폭행 사건(1991년 수십명의 여성들이 라스베이거스의 호텔에서 미 해군 항공단과 미 해병 항공대의 명예가 실추된 사건)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강력히 표명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도시 근로자에서부터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애썼습니다. 또한 운수 세출 위원회(Transprotation Appropriations Committee) 위원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가족 및 의료 휴가법(Family and Medical Leave Act)을 통과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 모든 활동에도 불구하고 패티는 열렬한 정치 활동가이자 변함없는 엄마로서의 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워싱턴에서 성실하고 근면하며 부패되지 않은 활동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민주당 전국 위원회 의장인 테리 맥올리프(Terry McAuliffe)는 패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는 활력이 넘치는 진취적인 사람이에요. 떠오르는 샛별 상원의원 중 한 사람이죠.”무엇이 패티로 하여금 그런 열정을 갖게 만들었을까요? 전장에서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어느 날, 그녀는 무엇이든 의논하는 자신의 10대 딸인 사라에게 물었습니다. “사라가 제게 묻더군요. ‘엄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때 제가 말했지요. ‘오늘도 여느 때와 똑 같은 날들을 보냈어. 대체 내가 왜 이래야 하는지, 정말 그럴 가치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 그러자 사라가 제 눈을 바라보면서 말하더군요. ‘엄마는 언젠가 제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거예요.’ 딸애가 제대로 말해주었죠. 나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내 딸과 다음 세대의 젊은 엄마들을 위해서 나는 이 일을 해야 합니다.”